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 (문단 편집) === 장전우의 죽음 === 1912년 8월 8일, 무창의 호북군 제1진 병사들이 봉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호북성이 기반인 부총통 [[리위안훙]]은 군사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하는 한편 8월 11일에 평소에 위안스카이에게 전보를 쳐서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북성 군무사 부장 장전우가 그 주모자이며 장전우와 방유가 군사들을 꼬드겨 도적들과 결탁하고 공화제를 파괴하며 반역을 밀모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리며 자신은 의리 때문에 장전우를 덮어줄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으나 인내와 지혜가 모자라니 위안스카이에게 좋은 방법을 알려달라고 보고했다. 이는 자신이 직접 장전우를 죽였다가 혁명당의 원한을 살 것이니 위안스카이의 손을 빌려 장전우를 처치하려는 리위안훙의 계략이었다. 장전우는 과거 [[무창봉기]]에 참여하여 손무, 장익무와 더불어 [[신해혁명]]의 3무로 불리던 혁명가 중 한 사람으로 호북성 군부에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위안스카이 역시 혁명당인 장전우가 마음에 들리가 없었기 때문에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리위안훙의 속셈을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았기 때문에 [[펑궈장]], [[돤치루이]], 강계제 등 고급장령들에게 명령하여 차례로 장전우를 초청하여 대접하라고 지시하여 그의 긴장을 푼 다음에 8월 15일 사건 진상을 조사하지도 않고 장전우에 대한 사형 집행 명령서를 발부했다. 문제는 8월 8일에 장전우는 위안스카이의 초청을 받아 몽골 변경에 대한 조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베이징에 가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장전우는 8월 10일에 아무것도 모른체 베이징에 도착했고 13명의 장교와 30명의 수행원이 늘 장전우를 수행하고 있어서 장전우가 몰래 무창으로 가서 반란을 사주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할 증인은 수두룩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8월 15일 밤, [[돤즈구이]]가 장전우와 그의 부하 장유를 체포했다. 장전우는 사건이 날조된 것이라고 항의했지만 육군총장 [[돤치루이]]는 그의 변명을 듣고 싸늘하게 비웃으며 그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을 했고 16일 오전 1시, 장전우는 군정집법처 처장 육건장의 지시로 재판 한번 받지 못하고 끌려나가 총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